제목을 짓다 생각했다. 나는 생산요소조차 되지 못하는 비경제활동 인구구나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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턱 괴고 서핑하다 일전에 보았던 시대정신 동영상을 보았다. 처음 보았을땐 꽤나 충격적이었고 결국 내가 내공을 기르고 싶다는 욕구를 가지는데 일조한 바가 있다. 지금에야 다시 보니 허점들도 많다. 역사적 언급들이야 딴지를 걸 수 있는 입장이 안되지만 빚을 갚는데 더 많은 빚을 창출해야 한다는 식의 생각은 화폐의 빚은 일괄적인 시간에 갚아질 필요가 없다는 점과 다양한 화폐공급 경로를 무시하는 발상이기 때문에 조금 극단적이다. 하지만 역시나 극적인 효과를 준 동영상은 거부감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재미있기도 하다. 언젠가 2페이지만을 읽은 뒤 졸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 푸코의 책을 교수님의 말씀을 빌려 인용하자면 마치 사회는 감옥과 같다. 사람이 가지는 생각이라는 것이 본래 주체적이기 어렵다. 미디어는 물론 정치에 영향을 받은 교육 및 문화 등에 영향을 받는데 결국엔 사회의 정치 및 경제적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문제는 생각이 어디서 왔는가하는 각성을 가지게 되어도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사회 시스템과 죄수복을 입고있는 자신을 발견할 뿐 어떻게 할 도리가 마땅찮다는 것이다. 경제력이라는 쇠사슬로 묶여버린 현대 도시인들에게는 지속적인 소비가 욕망되고 그를 위한 생산이 불가결하며 간간히 얹혀지는 빚이 그의 '어쩔 수 없는 노동' 을 강요한다. 상당히 세련된 생각이기도 하고 사실이라면 상당히 세련된 전략이기도 하다. 굳이 음모론을 들먹이고 소수가 세계를 지배한다고 극단적으로 생각치 않아도 불균등한 구조와 계급적 이해가 걸려 쳇바퀴가 되어 돌아간다.
지금에서야 열폭증세였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과거 생각대로 산다는 아주 매력적인 문장을 공격했던 내 감정이 바로 이 곳에 기반되어 있다. 그놈의 생각이 도대체 어디서부터 나온 것인가하는 성찰이 없이 모두가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비슷한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이 어이가 없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감정과 느낌, 만족 및 쾌락과 행복에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모습이 지금 읽고 있는 책과 함께 오버랩된다. 세속적 행복추구가 최선의 삶이라는 식의 문화적 감성 역시 자본주의적 시대정신이나 과거 기독교적 신앙과 다르지 않은 체계적 기만일 수가 있다는 이야기다. 도대체 나의 행복과 감성이 왜 그것이 반응 하는지 인문학적 회의감 없이는 우리 모두 정치 경제적 감옥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모든 것이 돈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라는 진부한 사실 때문이다. 회의감을 가지고 진짜 나로부터 시작해 비판적인 자아부터 주체적인 사상을 가지고 생각을 발전시켜 나갈때 비로소 생각대로 사는 것이 의미있어지는 것은 아닌가 싶다. 물론 강요할 생각은 없다. 그보다 중요한 것이 민주주의와 존중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주주의적 가치에 의해 강요될 수 없는 생각들은 경제력에 억압받거나 혼자 표류하게 되고 ,자본주의적 과자를 열심히 행복하게 섭취하는 기만당하는 노동자들로 가득찬 '생산요소' 들은 행복하게 잘 살아간다. 어떤 이는 이야기한다 행복을 느끼고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자신을 기만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사는대로 생각해버린 사람들이 이야기 하는 생각대로의 삶이 사는대로 사는 삶과 도대체 무엇이 다른가 궁금함을 남겨본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아무리 각성하더라도 왠만하면 그냥 쳇바퀴의 한 요소가 되어버린다. 가장 무서운 것이 그것이다. 가장 세련된 것이 그것이다. 이제 앎과 정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개인주의와 함께 생활과 가정에 '충실' 해야만 하는 도시인들은 알더라도 그저 기존의 양식대로 살아가는 수 밖에는 없다.
그리고 서핑중 '우리' 라고 지칭한 이들을 타자화하는 구역질 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우리' 를 타자화하며 비난하며 비꼴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것이 '우리' 이고 나이고 너이고 나의 가족, 너의 가족과 나와 너의 친구들이기 때문이다. 부정적인 어감을 붙일 생각은 없다. 잘못은 그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니까 말이다. 하지만 변화해야할 주체는 잘못이 없는 자들, 그들이 주체가 되어 변화해야 한다는 것은 새삼 당황스럽다. 나 역시 '생산요소' 가 되어 행복하게 잘 살아갈지 궁금하다. 흔히 거부감 없이 쓰이지만 자신 혹은 친분이 있는 자에게 적용하며 무척이나 당황스러운 단어이다. 그리고 꽤나 기분나쁜 단어이다.
아침부터 일어나서 머리아픈 글을 읽었다. 전문용어들이 날라다녀서 너무 힘들었다. 링크를 타고 계속해서 관련글을 보다보면 가장 우선적으로 드는 생각이 '과연 필요한 사업이었나' 라는 의문이었다. 리스크를 정부가 짊어지고 벌이는 개발사업인데 기존에 前자본주의 단계와 달리 확실한 수요와 사업성이 있었는지도 의문이다. 겨우 7%밖에 되지 않는 기존 예측에 비한 이용자 수치를 볼 때, 링크에 걸린 전술적인 고려로 수익을 얻을 수 있다고 하여도, 사업손실을 정부가 떠안는 형태는 심해보인다. 개발이 상당히 이루어진 상태에서 손실을 감안하면서까지 필요한 공공재였는지도 의문이다. 사업성을 심사한 회사가 해당 사업의 수익과 연동되어 수수료를 받는 구조가 아니라면 과연 제대로된 심사가 이루어질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애초부터 민자회사들은 그냥 참여해버리는게 무조건적으로 유리한 형태인걸 보면 한숨이 나온다. 시장과 공동으로 추진할 사업이라면 손실역시 공유해야하는 것인데 저런 구조라면 기업가정신이 튀어나오기는 커녕 먹튀본능만 불사르는 꼴이다. 애초에 할부금 쥐어줘가며 벌여야 했던 사업인지도 의문스럽다. 이 역시 푸그님의 견해처럼 국유화가 타당해져버린 구조인데 어찌할 도리없이 정부가 손실을 떠안는 상황은 어디서 많이 본 상황이다. 금융계만 그런 것이 아니라 건설 산업계도 리베이트같은 낡은 수법 이외에 이런 식으로도 부를 창출할 수 있는게 신기하다. 어차피 비지니스란 상대가 누구건 빨아먹으려는 본능에서 비롯된다. 따지고 보면 문화적 과자를 비롯한 각종 마케팅도 근본적 필요에 기댄 것이 아닌 스스로 수요를 창출시키려는 속셈의 일환이 아닌가 말이다. 이득은 민간이 보고 손실은 공유하는 상황은 '정의 상' 용납되기 어렵다. 국익에 중요한 사업이 개인의 손에 매달려서는 안 되기 때문에 시장으로부터 제외되어야 하는 상황이 있는 것이다. [제3의 길, 앤서니 기든스, p47] 애초에 계약이 잘못 되었다. 있을지도 모르는 손실을 감내하고서라도 투자에 나설때 비로소 사업성을 측정할 수 있다. 잠재적 손실가능성이 있음에도 투자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상황은 시장의 입장에서 역시 자원이 비효율적으로 배분되었기 때문에 비난받아 마땅하다. 진정한 시장주의자는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시장이 옹호되는 이유는 효율적 자원배분에 최적인 체제이며 그가 사회적으로 및 개인적으로 효용을 극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제학적이고 추상적인 근거지만 이를 내세우는 시장주의자는 없다. 다만 자유지상주의자나 자본주의자가 활개칠 뿐이다. 그나마 가끔의 좌파의 탈을 쓴 우파로써 기능하는 정치세력들 및 어정쩡하게 제3의 길을 걷는 이들이 시장의 순기능을 외치지만 모호한 사상에서 끝나고 만다. 이제나 저제나 결론은 그저 자본가만 좋은 일 또 하게 생겼단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 결론을 내어보니 이건 뭐 케이스만 다를 뿐 새삼스러운 일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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