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트릭스

감상과 일상 2009. 8. 27. 03:09


웹서핑질 하다가 재밌는 글을 읽었다. 처음 든 생각은 도대체 사이퍼를 어떻게 비난해야 하는 것인가? 이다. 밑밑 포스트에도 똑같이 써 놓았듯이 .. 지들 좋다고 선택하는 이들을 도대체 우리가 무슨 근거로 비난할 수 있딴 말인가! 진실이 아니라고? 그거 강요 아닌가? 늬들이 진실인지 진실이 아닌지 어케 아는가? 난 진실이 아닌 것을 선택하겠다 하면 뭐라 말할 건가?
 .. 안주하려는 사람의 심리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모든 시선을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



매트릭스 자체보다 매트릭스하기 라는 행위들이 더 재밌지 않는가하는 의문의 리플을 달았다. 매트릭스를 깨려고 출현했던 소련도 결국 매트릭스하기를 실행했고 암튼 매트릭스는 지금 대충 보아 한개로 되었다. 매트릭스 하기를 끊임없이 시도해야 한다고 했는데 대충 트로츠키와 비슷하다. 근데 사람은 편하길 원한다. 기본적으로 매트릭스가 불편하니까 깨려는 게 사람이다. 영화에서는 진실을 위해 싸우는 영웅을 그렸찌만 그게 어디 가능한가. 그리고 한정된 인적자원 한에서 가능 할 수도 있지만 영웅들로 이뤄진 태평성대라는거 믿음직하지도 않다. 영웅 죽으면 어쩔건데. 가장 필요한 건 역시 사람들에게 가장 적합하고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구조와 시스템이다. 매트릭스 깨기 시스템이 구조화되는 것이 필요할 텐데 너무 행동비용이 많이 든다. 피곤함때문에 트로츠키가 거부당했다는 뭐 그런 썰도 있던 것 같다. 그렇다고 편하고 만족스럽게 먹고 자려는 사람들의 행태를 비난할 것인가!? 그러면 바로 그것이 뭐가 의미가 있는가? 매트릭스 영화는 의미심장한 의문을 던져주지만 그 상징들을 끌어와서 이것저것 재밌게 알고 알아보고 호기심을 가질 수 있지만 내가 보기엔 모든 영화들은 결국 관심사를 환기시키는 수준에 머물지 크게 끌어다 쓸만 하게 가치로운 것은 몇 없는 것 같다 .. 다크나이트는 꽤 심각했지만 ;; 

일단 헐리웃과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매트릭스의 본고장인 미국에서 일부러 저 매트릭스를 만들었다는 사실도 3편 연작으로 했따는 것도 웃긴다. 그리고 갠적으론 2, 3편 되면서 영화의 촛점이 쫌 불편하고 흐릿하게 흐르는 것 같다고 느꼈다는 것이다.

뭐 오래된 말이다. 진리라고 말할 수 잇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 구조라고 인식하면 그리고 일반적으로 인식되는 거면 구조가 아니거나 구조지만 알려져도 상관없을 힘을 가진 구조거나 별 가치롭지 않은 담론이거나 그 구조 밖에 또다른 알려지지 않은 구조가 있다는 것이다. 초점을 흐르기 위해 .. 아 모르겠다 .. 3시가 비까지 오는데 .. 잠이나 자야겠다 .. 그리고 구조를 마치 인습따위로 보고 해체한답시고 하는 구조주의 이후 담론들은 .. 솔까말 아직까지 그닥 괜찮은 것들을 보지 못했다. 해체주의 건축이란것도 .. ㅋ 웃긴다 ㅡㅡ 보여지는 것에 집착하는 것만 같다. 청계천 지었다고 좋다고 환호하는 매트릭스 안의 스미스들처럼 .. 그인간들이 보여지지 않는 업적을 보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 결국 보여지지 않는 좋을 업적들이 보여지지 않는 구조나 시스템도 문제고 홍보되지 않는것도 문제일 수 있고 관심없는 것도 문제일 수도 있고 문제야 많다. 해체주의 하시는 것보다 집시 몇명 계속 살해 당하던데 가서 그 돈 쪼개서 좋은 집좀 지어주든가 하는게 더 가치로운 일 같다.  허영 허세는 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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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이성의 비합리성을 목격하는 일은 재미있다. 기억과 사고행위가 얼마나 불완전할 수가 있는가를 보여주는 매체들이 많다. 재밌는 것은 그를 말하는 주체가 뭉뚱그려 '주류'매체라는 사실이다. 더불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을 정도로 접근성이 뛰어난 유행과 같은 '사고'라는 것도 재미있다. 유전자나 세포에 의해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는 것이 인간이라거나 미디어에 의해 세뇌 비슷하게 받는 것이 우리네 대중이라거나 하는 말들은 누구나 접하고 몇 시간 심각하고 진지해졌다가 이내 웃으며 잊는 사고의 유희이자 놀이의 일종이다. 하지만 극단성을 배제하고 보면 그냥 놀이가 아니다. 물론 엄청나게 진지할 것 까지도 없다. 더 재미있어진다는 이야기다. 분명 노무현 정권에 하루가 멀다하고 미디어를 달궜던 '양극화'라는 주제는 어느새 찾아볼 수도 없으며 몸과 마음이 따로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그다지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일 것 까지야 없다. 맨츄리안 캔디데이트, 재미있다. '洗腦', brainwashing, 뇌를 씻는다는 의미다. 재미는 있는데, 뭘 어떻게 생각하고 더 어떻게 결론을 내야할지 모르겠는 주제다. 세뇌를 당했다고 세뇌를 당했다고 세뇌를 당했다고 세뇌를 당했다고 세뇌를 당했다고 ……. 어디서부터가 시작이고 우리를 구성하는 것은 무엇일까? 유전자, 어쩌면 이것도? 세포, 백지로부터의(?) 뇌, 몸, 가족, 교육, 친구, 性, 책, TV, 신문 등 mass media, 영화, 드라마, 직장, 군대, 친구, 가족, 음악, 그림, 심장, 사랑, 진심, 가식, .. …… 무슨 단어로 끝을 내야 할까? 당장 옆을 보니 보이는 단어들은 음모, 위험, 설득, 향료, 군중, 경제, 소비, 영혼, 소유, 세계화, 도덕, 빈곤, 인간관계 ……. 정치, 사회주의, 공산주의, 자본주의, 민주주의, 소비에트 ……. 세뇌라는 말을 언급해서 이득되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보통 요즘은 우익과 미디어가 세뇌의 가해자로 지목된다. 세뇌 당했다고 세뇌당했다고 생각하니 재밌다. 골치 아프다. 이렇게 까지 갈 것은 없고, 그냥 일상을 살다가 가끔 끄집어 내고 적용할 만한 사례에서 각성하는 것 정도로 충분하지 않을까 하고 허접하고 소극적인 결론을 내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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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for Vendetta

감상과 일상 2009. 7. 13. 01:30

.. 솔직히 실망한 영화다 ..
하도 좋은 평이 많아서 기대하고 봤는데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

평을 보고는 더 실망했다. 모두들 한국현실을 들먹이며 감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치 난 아무리 그런 영화 만들어도 절대 현실에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 말하는 영화사와 감독등의 비웃음이 들리는 것 같아 불편했다. 브이를 약간은 평범한 인간 이상으로 그려놓은 것도 그렇고 브이의 개인사적 복수를 마치 민중의 뜻인양 등치시켜 놓는 영화기법도 불편했다. 다크나이트를 먼저 봐서 그런지 왠지 그 조커가 많이 차용한 것 같은 느낌이다. 영화니까 그렇다 치지만 결국 영화니까 아무 힘도 없다. 그저 영화일 뿐 기대했던 내가 더 한심해 보인다. 선거 직전에 바이러스를 퍼뜨리고 제약회사의 주가를 띄우는 부분만은 꽤나 신선했다. 뭐 신선한 것 보다는 재미가 있었다. 단지 서틀러와 크리디가 죽고 의사당이 파괴되고 민중이 정치의 최전선으로 나선다고 해당사태가 해결될까? 정의롭고 어쩔 수 없는 살인이라기 보다는 뒷감당 안되는 말썽꾸러기로 보인다. 서틀러와 크리디가 죽으면 그 밑의 수하들은 다른 쿠데타를 일으키지 않을까? 또 다시 보안과 혼란억제와 질서유지를 내세우면서 물리력을 앞세워서 말이다. 그리고 하필 왜 의사당인가? 서틀러와 보다 직접적으로 관련된 건물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그렇게 설정해논 영화의 의도라면 의회제를 박살내 버리겠다는 상징적 의미로 받아들여도 되나? 뭐 앞서나가지만 말이다. 혼란 뒤에 필연적으로 군사정권이나 파시즘, 공산 정권이 들어선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나 역시 촌평을 해보자면 왜 하필 의사당인가? 서틀러 벙커의 위치를 알리거나 수상 관저를 목표로 삼는게 아니라? 대중이 열광하면 할 수록 오히려 더 워너브러더스 사는 돈을 벌겠지 하는 뒤틀렸다고 볼 수도 있는 생각도 쫌 싫다. 내 알기로 무정부 상태가 좋은 방향으로 끝난 적은 없다. 영국은 위너 테잌스 올이니 무정부 상태 자체가 이루어 질리가 없고 프랑스는 무정부 상태라 나치에 먹히고 독일은 나치가, 이탈리아는 파시즘이, 소련은 역시 볼셰비키가 정권을 잡는다. 스페인은 프랑코, 포르투갈도 살라자르가 정권을 잡는다. 미쿸 보수주의의 수법과 나찌를 합쳐 놓은 것은 재미있다. 영화는 영화다. 저런 영화가 할리우드에서 버젓이 나오는게 날 더 불편하게 한다. 자본은 돈 되는 것이면 뭐든지 먹어 치운다. 저런 영화가 버젓이 등장하는 것은 그만큼 자신감이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아니면 해먹을 만큼 해먹었다는 뜻도 되겠다. 그렇게 민주주의가 좋으시면 차라리 국민소환제를 이야기 하시지 그러는가? 왜 굳이 파시즘과 연계짓는가 미쿸이 정말 저런 사회였다면 이런 영화 나왔을까나? 체 게바라 티셔츠 팔아제끼는 거랑 뭐가 다르단 말인가? 도대체 혁명 혁명이 이야기 하는 사람 중에 그저 감동 받아 이야기 하지 진심을 담거나 각오가 되있는 사람이 있을까나? 모르겠다. 브이 포 벤데타를 보고 감동먹은 사람 중 얼마나 많은 비율의 사람들이 단 한번이라도 시위에 동참했었을지. 혁명이 없는 시대니까 혁명의 이야기가 가능한 거다. 만약 저 영화를 보고 내가 전율이 돋으며 브이를 미화하고 우리도 저래야돼 뭐 이런 반응 보인다면 스스로에게 실망과 자조를 보낼 것이다. 아직 아무 가치관도 서지 않았다. 니체를 읽은 적도 없고 파시스트도 아니다. 하지만 노무현을 욕했던 이들이 하루 아침에 서거에 애도를 표한다고 했던 사실은 알고, 브이가 없었으면 행동하지도 않았을 가면민중이 보인다. 결국 이건 민중 엿멕이는 영화다. 브이가 없었으면 행동하지 않았을 아니 못했을 민중의 힘과 역량을 제대로 조소하는 영화다. 한없이 불편하다. 비약에 비약을 거듭하는 영화평이지만 최악의 비약은 브이가 크리디의 수하를 멋드러지게 죽이며 내가 복수라는 것에 대해 의문을 품을 때 팔레스타인 민중이 생각났다는 거다. 물론 엄청난 비약이다. 영화가 한계가 있다. 좀 더 세심하게 그럴 수 밖에 없었던 다크 나이트의 라미레즈 경관 같은 인물을 출현시켰다면 좋았을 것이다. 나탈리 포트만의 역할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마지막에 사랑 어쩌구 하는 부분도 이해하기 어렵다. 11월 5일에 대한 설명도 부실하다. 신념때문에 고통없는 약을 투여하면서까지 살인을 하는 브이를 대의를 위한 혁명가로 이해해야 할까? 순교자? 영웅의 아류? 아 더 이상 쓰기 싫다. 아무튼 명성에 비해 상당히 실망한 영화고 뒷맛이 찝찝하다. 뭔가 생산적으로 찝찝하기 보다는 좀 짜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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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본적으로 볼셰비키 혁명과 극우 파시즘의 등장은 1차 대전의 여파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1차 대전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형성되기 힘들었을 反정치적 구호를 내세운 정치운동이라고 보는 것이 맞는 듯하다. 대중이 정치의 전면에 등장하는 것에 발맞추어 그들의 요구와 심리를 교묘하게 파고든 선동적 전술과 우연성이 강한 운이 겹쳐져 발생한 몇 안되는 사례로 보여진다. 파시즘과 공산주의가 실패한 수많은 사례들이 그를 뒷받침한다. 일단의 공통점을 살펴본다면 사회주의 세력의 비권위주의가 역설적으로 정치적 공백을 낳은 것으로 보여진다. 대중의 요구를 효율적으로 관철시키지 못하는 우유부단함과 맑스주의가 교리화되었다는 점도 공통성이 있다. 묶어버릴 수 없는 각각의 특수성과 의문점들이 산적해 있다. 
 피상적으로 극좌도 극우도 아닌 대중의 마음을 극좌나 극우 어떤 세력이 먼저 차지할 수 있었느냐로 보이지만 너무 단순화 시킨 결과인 것은 물론이다. 더불어 자세한 사항은 알지 못하지만 20세기의 정치지형은 농민이 어떠한 입장을 보이느냐에 따라 엄청난 차이점을 보여온 것으로 보인다. 독일과 이탈리아 농민은 파시즘을 선택했고 러시아는 결국 볼셰비키를 지지했으며 북유럽은 여건상 의회 사회주의를 채택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역시 피상적이지만 오랜동안 민주주의적 전통이 강하고 문화적 선진국의 지위를 유지하던 영국과 프랑스는 어떤 극단 세력도 꽃피우기 힘들었다. 더불어 해당 정치운동들의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물리적 힘이 적지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기존 질서 안의 군인들이 물리적 힘을 가지고 해당 정치운동들에 동참한 것이 그들에 상당한 힘을 실어주었고 이 요소가 기득권에게 그들을 무시할 수 없도록 만든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경제적 비참성이 최악의 길을 달렸다는 점 역시 그가 정치적 극단성을 불러왔다고 생각된다. 후발 산업국에선 상당한 성과를 거둔 극단 세력이 역시 북서부 유럽에선 뿌리내리기 어려웠다는 피상적 결과가 있긴 하다. 1차 대전 후의 정치는 질서라는 화두가 중요한 의미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우파에 대한 대중의 감정 역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어 보인다. 러시아 10월 혁명에 가장 연관된 정치적 사건이 반동적 군인의 수도진군 사건이며 북서부유럽은 보수파 기득권에 대한 적대감이 극단적이지 않았다는 점 역시 작지만 그 시절 역사의 한 요소가 될 수도 있다. 더불어 거부감을 가질 수 있는 명제지만 탁월한 지도자 역시 그 존재 여부가 각 국 역사에 중요한 의미를 가졌던 것으로 주장하는 글이 많다. 물론 핵심적 요소는 아니지만 배제하기 힘든 영향을 가졌다는 것이다. 한 두가지의 고정적 역사관으로만 시대를 보는 것에는 문제점이 많은 것으로 보여진다. 이를테면 권력의지를 가진 지도자를 가진 정치집단 보다는 사상의 순수성에 집착한 정치세력들이 대부분 실패를 겪었다. 물론 이는 20세기 '난세'의 이야기이니 지금에 와서까지 그 교훈을 얻으려는 시도는 부적절할 수가 있다. 하지만 대중 시민은 필요한 경우 등을 돌리더라는 고전저작들의 입장은 오늘날 대한민국에까지 적용된다. 더불어 러시아 혁명기는 국가수반이 원정을 떠나 수도에 없었고 독일과 이탈리아의 치안상태는 좋지 못했으며 정치적 선동에 국가가 단호한 대처를 내리지 못했다는 행정부의 행태를 언급할 필요가 있다. 비교해 영국과 프랑스는 정치적 선동에 국가 권력이 선제적이고 단호한 대처를 내린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는 지금 대한민국에까지 적용해 볼때 꽤나 의미있어 보인다. 하지만 어느경우이든 경찰력이 아닌 군대의 치안행정 투입과 '발포'의 여부는 역사를 가르는 또 하나의 중요한 물줄기가 되었다. 하지만 이 경우에서 또한 절대적인 요소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지금의 버마같은 경우엔 상습적 발포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것이 타국의 경우처럼 상당한 역사적 변화를 가져오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발포여부가 우발적인 것인지 혹은 지도자의 뻔뻔함에서 나온 명령에 의한 것인지 여부가 중요해 보인다. 이 곳에서 역시 이른바 지도자의 역사적 중요성을 무시하기 힘들어 보인다. 
 역시 대충 훑어보면 큰 혼란 없이 유지해온 경제와 정치제도 속으론 극단적 정치운동이 파고들기 힘들다는 명제가 단순하지만 상당한 의미를 갖는다 할 수 있다. 그리고 사회의 불만세력의 계층이 어떠한 것인가에도 지금까지 그 중요성이 부각될 수 있어보인다. 파시즘과 극우세력은 농촌을 기반으로 성장했지만 나중엔 그들을 버리면서까지 중간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행태를 보였다. 그에 반해 자세한 사항은 솔직히 모르지만 러시아의 경우 대다수의 군중의 계급은 빈민 노동자와 최악의 경제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농민이라는 사실이 있다. 이는 챠베쓰의 집권이 중간계급의 표에 의해 갈라졌다는 베네수엘라 좌경화의 시발점과 우리나라에 중간계층이 많으며 한국 진보가 그에 맞은 대책을 내놓을 구호가 부재해 보인다는 지금의 시대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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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난다

감상과 일상 2009. 5. 23. 15:28

언론이 더 나쁜 새끼들이다. 정직을 입에 바르고 진실만을 이야기 한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결국 맞추는 포커스와 내미는 어젠다는 결국 그 밥에 그 나물이다. 어디 언론이 노무현 전 대통령과 관련된 돈의 사용처와 목적, 성격에 초점을 맞추거나 그를 전 대통령이나 타 정치인들과 비교하거나 적어도 그 숫자만이라도 비교분석 해준 적이 있는가. 얼씨구나 좋다고 노무현 까대기에나 바쁘고 어느샌가 장자연 리스트와 이메일 사건, 용산참사등은 사라져 버렸다. 이것이 여론을 반영하는 민주주의 국가의 언론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가. 떡찰이나 청와대를 욕하는 것은 의미 없는 스포츠가 되고 말았다. 일어난 일들에만 진실이라는 교활한 잣대를 들이대며 정직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언론은 옳은 일에 여론의 방향을 이끌어 가는 일도 해야한다. 이 시대의 자살에는 사회적 타살의 의미 역시 있다. 개인사로만 몰고 가는 것은 아니다. 구조적인 문제에 그리고 언론 스스로의 문제를 반성해야 한다. 문제제기나 공론의 장을 여는 것은 개개인의 힘으로 부족하다. 더불어 언론은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그를 묻어버린다.
▶◀ 죽어가는 언론에 조의를 표한다.



그리고 지겹게 포스팅하지만 좌파 우파 그만 말하자. 아니 말하면 적어도 그 논의는 이용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자. 좌파와 진보는 동의어가 아니다. 진보는 진보일 뿐 이념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 아무리 노무현이 뭇매를 맞아도 그는 진보였다. 하지만 좌파는 아니었다. 우파도 아니었다. 그래서 더 쳐맞았다.
< 믿고 있던 상식이 무너지면, 사람은 누구나 투사가 되는 것이다. > _ 급진적 생물학자
돌발영상을 '왼쪽으로 치우친 방송'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고 도대체 어떤 말을 해야할까 정리도 되지 않는다. 돌발영상이 없는 진실을 드라마처럼 찍은 적이라도 있단 말인가. 편집이 이념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돌발영상 뿐만이 아니다. 그리고 좌파가 여론을 반영하고 여론에 동의를 얻을 수 있다면 '왼쪽에 치우친 방송'은 곧 '여론의 목소리'에 다름아니다.
김용철 변호사의 배신(?)을 시작으로 많은 게 터졌지만 지금 역시 묻혔다. YTN문제는 나도 어느정도 적게 다루고 있었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듯 모두가 묻혀가는 것이고 그것이 권력이 우리(?)를 다루는 방식이다.
체포된 자이든, 체포한 자이든 체포가 부당하다면 모두 피해자이다.

그저 밥이나 먹고 살고 싶으면, 세상에서 어떤 부정이 저질러져도 어떤 불의가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어도, 강자가 부당하게 약자를 짓밟고 있어도 모른척 하고 고개숙이고 외면하라고 비겁한 교훈을 가르쳐야 했던 역사를 바꿔야 한다. _ 노무현

보통 이런 선전은 수꼴이 잘해야 정상적인데 그럴 능력이 없는듯?
뭐 물론 잘한것만은 아닌데 .. ??

모두 묻혀버립니다. '나는 몰랐다'는 그 짧은 언사에 담겼을 남편과 아버지로서의 고뇌가 해소되지 않습니다.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으로 자신을 내몰아야 했던 한 인간의 번민이 해소되지 않습니다. 그 고뇌와 번민이 진실이라면 그렇습니다. 나는 몰랐다고 두번 세번, 아니 수십번이라도 항변하고 싶지만 그러면 부인과 자식의 등을 떠미는 것 같아 차마 하지 못한 한 인간의 비애가 묻혀버립니다. 검찰이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리면 그 고뇌와 번민마저 변명과 합리화로 채색돼 묻혀버립니다. by 미디어토씨

촘스키의 책을 읽다가 발견한 구절을 보고 국내 적용시켜 보았다. 설마하고 자료를 좀 찾아 보았지만 이건 최악이라고 표현해도 좋을지 아니면 그냥 그런 수준인지 가늠이 안 되고 있다. 뭐 구체적으로 촘스키의 책과 관련된 리뷰는 아니기 때문에 따로 포스팅을 하기로 한다.



다음에서 '금산법' 으로 뉴스 검색을 한 결과 2009년 5월 8일 4시 30분 경 뉴스 검색 결과에서 그나마 눈에 띄는 기사를 보았다.

폴리뉴스 : ‘금산분리완화’ 왜 ‘삼성 특혜법’인가
한겨레 : [삶과경제] 금융지주회사법 파동의 내막 / 전성인

음 경제학 원론으로 나 같은 꼬꼬마에게도 명성을 날린 전성인 교수님의 글이다. 요컨대 4월 30일 국회에서 이미 날치기로 상정되었던 법안이 어쩌다(?) 여당에 의해 부결되었다. 원안에 끼워넣기 하여 개정안을 통과시키려 했으나 둘 다 어쩌다(?) '여당에 의해' 부결되고 논란이 있는 개정안을 별개로 편법 처리할려다 띡 걸렸다. 음 제대로 완벽하게 만들어서 통과시키고 싶은걸까 얘네들 뭐하는 건지 모르겠다. 하긴 지금처럼 모든 관심이 이명밖 갂하께서 하고 계시는 이른바 '똘짓(?)' 들에 집중되어 있고 패밀리가 떴다의 발전방향이나 각자의 사랑과 행복 또는 돼지 인플루엔자 따위로 걱정하고 관심가지고 있을 때 제대로 처리하려는 수도 있다. 뭐 후자의 관심이야 등돌린 이도 있지만 모두 한마음으로 비난(?) 혹은 비판하는 이가 있으니 그 이름은 뭐 말 안해도 상관없을 듯 하다. 문제는 표면적 권력자에게 세간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정부는 나쁜 놈이다 라고 세뇌 교육 시키는 것이 '그들(?)' 의 수법이라고 말하는 데에 있다. 뭐 새삼스러운 문장으로 듣고 넘길 수도 있지만 국내 상황에 적용시켜 보니 썩 편하게 다리꼬고 앉아서 책만 읽어제낄 상황은 아니다. 박노자씨의 글을 읽고 조선일보와 보수세력들이 '실수' 했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다. 아니 근데 이건 왠걸 다시 보니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끄고 보자는 심산이었던 거다. 정말 철벽이다. 요즘은 누구나 한마음 모아 누군가를 욕하지만 아무도 삼성의 이름은 말하지 않고 있다. 삼성이 이미 권력이라는 말은 그저 음모론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 민감한 문제들이 많다. 이대로라면 정말 삼성 공화국이 될지도. 청와대에 저렇듯 이슈메이커 께서 자리 잡고 계시는 한 이거 별일 없이 처리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자본과 노동의 대연합 같은 말들 설득력이 있을 수가 있지만 적어도 삼성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이미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삼성은 타협의 대상이 아니다. 그들은 정부도 두렵지 않고 노동 조합도 없으며 제대로 된 비판을 하는 체계적 정치세력을 맞서고 있지도 않다. 타협을 하느니 다 먹어치울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이제와 투자를 하는가 생각해본다면 그렇지도 않을 듯 싶다. 분위기 상 차라리 금융쪽으로 특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일 수가 있으며 금융의 돈이나 기존의 돈이 실물로 흐르기는 커녕 타 자산으로 흐를 개연성이 훨씬 크다. 지금 쌓아놓은 현금만 해도 도대체 얼마인가. 삼성은 오너 없이도 잘 돌아갈 수 있다. 물론 처분을 해야한다면 외국인 보다는 국내에서 해결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상관 없는 포스팅(?)

가르쳐줄 필요가 없는 것은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소위 제삼의길은 체제내 순응적 태도를 보인다는 점에서 해당 지식인은 그 이름으로써 부끄러워 해야한다고 말한다.
조금은 연결이 되는 말인데 소유적 실존양식을 강화시키고 소외를 조장하며 정치적 관심을 배제시키려 하기 때문에, TV 에는 달콤한 사랑의 말이 넘쳐나고 출판되고 팔리는 책들은 자신의 행복을 찾으라는 투의 내용을 게재한다는 식으로 확대해석(?) 할 수 있는 글들을 읽고 있다. 나만의 아전인수인가?


인터넷 상에서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공유하는 리뷰를 작성하기 보다는 개인적인 느낌을 싸지르는데 너무 집중한 듯 하여 그나마 영화에 대해 참조할 수 있을만 하고 공유할만한 영화 자체에 관련된 느낌들을 써보려 한다. 근데 더 다른 생각들이 나는게 사실이다 그리고 잡 생각이 많아지도록 하는 영화가 왠지 좋은 듯 싶다.

<경제라는 화두가 보수세력에 선점되어 있다. 사실 경제라는 화두는 진보세력의 씨앗이었는데도, 진보세력의 태동의 근본원인이 경제 논리였는데도 말입니다.>

블로그에 심취하기 시작한 나에게 블로그 써킹따위의 단어와 '이런 정보는 종이 신문을 통해 읽어야 제맛' 이란 대사는 조금 거슬렸다. 러셀 크로우가 'truth seeker' 라는 상당히 좋은 수사가 붙는 '기자' 역할을 하며 결국 진실을 찾아내고 신문사의 좋은 면을 비추며 결국의 반전 역시 희망찬(?) 내용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꼭 몸으로 뛰고 소식통과 쏘스를 통하여서만 찾는, 얻을 수 있는 정보들이 기사화 되어야 할까 싶다. 공공문서나 청문회 기록, 신문의 행간을 읽고 핵심을 비판하는 글을 쓸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stone 처럼. 1인 저널리즘과 블로그의 잠재력에 대한 논의가 많은데 그냥 무시하는 듯한 태도는 좀 거슬렸다ㅠ 보다 정보가 많아지고, 공개되어야 할텐데 아직 민주주의는 한참 멀었다. 예전에 재밌게 읽었던 기사를 링크한다. 진실은 중요하다. 진실을 '찾아내고' 그 진실을 '재구성 및 분석' 하고 견해와 주장을 하는 일도 중요하다.
'강준만과 미네르바... 그들이 주는 메시지'


군대조차 민영화 한다! _ 민간군사기업(PMCs : Private Military Companies)

아 일단 중간 부분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잔잔한 긴장도 풀어주었던 '국방시스템의 민영화' 에 대하여 여론에게 주의 환기를 시켜준 것만으로도 꽤 큰 점수를 주고 싶다. 소재가 아주 맘에 든다. 얼마 전 별로 긴 시간도 아닌 몇 달전에 큰 감명을 받은 것 중의 하나인데 특히 포인트콥이 군산복합체로서 정부 국방비를 많이 헤쳐먹는 중이라는 주제는 그야말로 낄낄댐의 대상이다. 중간에 누군가 러셀 크로우에게 이게 무슨 영화 드라마냐고 소리치는 장면이 있는데 참 재미있었다. 이미 다 알려질 대로 알려진 사실이고 극적 요소가 강해서 그런가 관련 음모론(?)들은 아주 풍부한 정보를 누출해주시고 계신다. 아마도 권력이 약간은 독점적 경쟁시장이거나 과점시장이어서 한꺼번에 힘을 발휘해 여론을 통제할 만한 빅 브라더를 만들지 못해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더 다른게 있어서 이걸로 퉁 치려는 수작인 것인가 혹은 그것들의 결말처럼 사람들에게 이런 거 없다 소설이다 라고 환기 하고 싶어서인가. 그 장면에는 '보이지 않는 마음' 이라는 경제학 소설이 생각났다. 거기서도 중간의 반전은 꽤나 끝내줬다. 뒤통수 제대로 치는 느낌이 들었다. 음 암튼 기업의 비리 따위나 전쟁의 비즈니스적 성격은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진 사안이라 여론에 '큰 관심' 이나 센세이션을 일으키지는 못 하는 것 같다.

이와 관련한 아주 유익하고 흥미로운 링크들을 걸어볼까 한다!

전쟁은 비즈니스다 _ foog
전쟁은 무기만 파는 것은 아니다. 식품도 보급해야 하고 자동차, 약품, 화학제품, 옷가지, 의료 서비스, 정보기기, 정보 서비스, 건설 서비스, 상수도, 가스, 전기, 석유, 재건, 군사훈련 서비스, 이 모든 것들의 유통 및 물류 등등 아주 다양한 것들이 보급된다. - 심지어 매춘까지. 민간군사기업은 현실상 독과점 형태로 군산복합체들이 카르텔을 형성하면 충분히 수주가격은 부풀리고 비용을 최대한 낮추어 서비스의 질을 형편없게 하여 이익의 극대화를 추구할 수가 있다. 민간군사기업은 국가가 아니기때문에 국가적 마찰을 피할 수도 있다. 헬리버튼 따위야 아주 유명하다!

미쳐가는 이라크에서의 민간군사기업 _ foog
<너희가 잉여노동을 착취하는 것은 내 관심사가 아니다. 나는 다만 (나에게 또는 불특정 다수에게) 물적 풍요를 가져다주는 자본주의가 잘 굴러가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러나 그것도 한도가 있으니 그 한도는 지켜달라. …… 이러한 것들에는 예를 들면 독점금지, 아동노동금지, 8시간 노동, 노동3권 과 같은 것들이 있다. …… 적어도 이라크 전쟁에 뛰어든 민간군사기업에게만큼은 개 짖는 소리임을 알 수가 있다. …… 역시 KBR 직원이었던 Linda Warren에 따르면 궁전이나 각종 청사의 재건축을 담당하는 직원들은 각종 문화재 및 귀중품을 훔쳐 eBay 에 팔곤 했다 한다. …… 그에 따르면 이라크의 업체직원들은 일종의 ‘매춘 조직’을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매춘부들은 쿠웨이트에서 바그다드로 장갑자동차로 수송되었다고 한다. 충격적인 사실은 이렇게 매춘부 수송을 위해 장갑자동차가 이용되는 바람에 다른 미션에 있는 이들이 이 차를 사용하지 못해 죽음을 당하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_ foog

민간군사기업 : 전쟁의 새로운 구성요소
핼리버튼의 '누워서 떡 먹기'식 장사비법
또다시 드러난 핼리버튼의 추악한 거래
양심의 대차대조표 : 부외금융에 국방 민영화를 빗댄 것이 재밌다!

※☆☆☆☆☆미국경제의 또 하나의 복병, 이라크戰
한 해에 GDP 1.8%, 1천8백억$ 에다가 여기까지 3조$가 소비되었다. 이라크에는 군인보다 훨씬 많은 수의 민간인들이 파견되어 있다. 군수산업의 하청업자와 근처 자영업자, 노동자에게도 부스러기는 돌아간다. 그리고 이는 정치적 진보를 막는 기제로 작용한다.
미군에 쓰이는 돈은 경제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비생산적이고 비효율적인 자원 배분이다. 더구나 관련 원가는 터무니 없이 낮다. - 과다청구. 승수효과는 크지도 않다. 세금과 복지에 쓰여야 할 돈들이 적자로써 미국 미래세대에게 부담을 안기고 있다.
<그렇다면 전비가 제대로 전쟁에 투입되고는 있을까. 오히려 그러면 안 될것 같은 기분이지만 말이다.> _ foog

http://foog.com/558
http://foog.com/27
http://foog.com/28


<未完> 관련 잡담1

모순을 비판하는 자도 모순과 비판에서 썩 자유롭지 못하다. 복잡한 세상을 한 두가지 기준으로 재단할 수 없다. 과시소비를 비판하는 자들이 그 위치에 오를때 과시소비를 하지 않는다고 장담하기 어렵다. 집과 차에 자아를 투영시키는 사람을 비판하는 사람이 게임 캐릭터에 자신의 자아를 투영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할 수도 있다. 문학작품에서 그러한 문제를 비꼬며 인간소외를 언급하지만 사실 역사적으로 새롭게 등장한 삶의 양식이라고 표현할 만한 새로운 일은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더불어 그가 사회에 문제됨을 찾기가 어렵다면 비판받아야 할까 그냥 인문학적으로(?) 빈정상한 것이 아닌가. 만약 그것이 결국 문제라 하면 그에 감성만 느낄뿐 마땅한 대안을 찾으려는 노력도 없는 것 역시 비판받을 만하다.


<未完> 관련 잡담2

아 재미가 있다 그리고 스포일러도 있다. 마지막이 마음에 들지가 않는다. truth seeker 라서 'truth'가 더 중요했던 기자의 입장은 이해가 가지만 일단의 시나리오가 마지막에 와서 기대를 져버린다. 'cliche' 를 피하기 위한 억지구성이었다는 느낌도 든다. 영화 중간의 내용들이 벌써 '진부한 편견' 따위가 되어버렸다는 말이 되는데 정말 기분이 묘해진다. 나조차도 많은 '부조리' 들에 저항하거나 비판, 행동하는 것보다 글이나 싸지르고 '새삼스러운 일들' 이라고 표현해버리는 모습이 또 묘하다. 1학년 국어작문 시간에 썼던 모순을 비판하는 자의 모순을 고발하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그 고발자는 모순이 없지 않고 모순은 다른 사회적 모순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으며 모순 자체가 기준에 의거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생각이 복잡해진다. 배설글로 반성하는 것이 '반성의 배설' 로 끝나버리고 나는 누군가가 말했던 일상 파시즘 속에서 살아간다. 영화에서도 말했듯이 블로그 써킹질로 생각있는 척하다가 돌아서면 쪼꼬릿을 먹으며 맛있다고 생각할 테고 앰네스티에 가입하며 1만원을 내는 것보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계정 등록을 2만원에 하며 더 큰 효용감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망설임을 가졌다는 것으로 스스로를 위안하며 유교적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말이 잇는 것 같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범죄다. 늘 행동하고 싶어하지만 고종석씨의 글을 읽으며 감탄하는 척 하고 '개인주의적 진보' 가 아주 참신한 개념이라고 생각하며 운동권을 비판하고 어느새 내 정치지형은 보수로 간다. 물론 보수와 진보를 그렇게 나누는 관점이 정책을 떠난 색깔론으로서 그다지 실질적 의미를 가지지는 않는다. 양비론따위는 역겹다고 생각하지만 자신의 관점을 명확하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윤동주 시인이 자신과 최후의 악수를 한 것처럼 나도 악수를 해 나갈 것이다. 개인주의적 연대를 하지만 물론 정치인 처럼 악수하지는 않을 것이다. 알면서도 행동하지 않는 것을 '권력이 경제적 헤게모니를 잡았다.' 라는 입장으로 정당화하는 것이 그저 '정당화' 로 치부되고 행동하는 양심과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분열한다. 그래서 헤게모니는 무섭다. 개인의 효용수준까지 문화적 배경으로 만들어버리고 벌써부터 '효용' 이라는 단어를 써가며 스스로의 양심을 합리화 시키고 있지 않은가. 사람들의 행동이 정치 및 여가 영역과 경제적 영역으로 철저하게 분리되고 그것은 당연시되거나 '또' 권력의 조장이라 '까거나' 한다. 물론 행동의 합치는 '어렵다' 고 말한다. 그것 부터가 '경제적 헤게모니' 가 아니냐고 생각한다. 자발적 복종이라는 개념은 유통기한을 지났다. 더불어 알아도 행동하지 못하는 경제적 헤게모니도 나에게만 신선했을 뿐 사실상 유통기한을 한참 넘긴 단어일 뿐이다.


앎이 효용구조를 바꾸는 경우
효용구조의 변화가 행동의 변화에 큰 탄력성을 갖는 경우
변화의 전위가 된다.


헤게모니는 주로 문화적 관점에서 쓰이고 경제적인 관점에서는 '강제' 라는 단어가 쓰이는 것을 알았다. 이런 식으로 공부해 나가는 것이라 스스로를 위안한다. 그렇다고 그런 관념들에 패배주의적 입장을 가지고 무기력증을 보이는 것은 한심한 자화상이고 그다지 바람직한 태도는 아니다. 내 행동이 자기 모순을 가지는 것이 '효용의 구조' 에서 나왔다면 그 효용의 구조를 바꾸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진심' 에서 비롯된다. 바꿔지는 것이다. 앎과 언론, 각성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알아도 행동치 않는 이들을 비판해서는 똘레랑스라 할 수 없다. 앎이 효용구조를 진심으로 바꾸고 그 이들이 행동함으로서 변화의 전위대가 되는 것이다. 어쩔 수가 없다 똘레랑스를 진짜 똘레랑스로 만들려면 전위대의 존재와 전략을 인정하는 수 밖에는 지금 생각나는 것이 마땅찮다. 시간을 가지고 점진적 개혁을 꾀하는 것이 나의 '주의' 이고 다양성을 존중하여 알지 못하거나, 알아도 효용구조가 바뀌지 않거나, 효용구조가 바뀌어도 행동하지 않는


비꼼이 어울리고 모순되지만 어차피 인간은 모순이고 변화하지 않는가?

하지만 결국 내가 행동하지 않는 사람이고 그 곳에서 멈추었기 때문에 이런 관용이 필요하다 말하고 나의 마음 편하려고 정당화시키는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 그래서 행동하는 이를 더 존중해줄 수밖에 없다. 행동하는 이가 계속 행동한다면 좋은 일일테고 행동하던 이가 변심한다해도 그것을 탓할 만한 자격이 되는지 의심해본다. 아쉬운 일이고 비판받거나 냉소를 받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행동하지 않는 이보단 낫지 않은가? 비꼼이 어울리고 모순되지만 어차피 인간은 모순이고 변화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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