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는 그냥 이것 저것 잡다하게 꾸역꾸역 먹는 중이다. '정리'라는 것을 하자니 밑천도 없는 주제에 뭐 정리할 건덕지가 있겠나 싶기도 하고, 똑같은 프레임 안에서 앵무새처럼 누구 따라하기나 하거나 비슷한 말만 반복하는 것 같았다. 대부분의 사람이 정계를 바라보는 눈빛은 아주 비합리적이고 감성우선적이라는 주장을 읽는 중이고, '자유 민주주의'라는 말이 얼마나 형용모순적이고 기만적으로 기능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있다. 그래도 여전히 내가 굳이 블로그까지 들어와서 끄적거리게끔 할 정도로 재미있는 주제는 역시 '헤게모니' 혹은 '프레임'과 관련된 생각이다.

 링크 : 경제가 죽었다고 한결같이 외치는 정치인들 _ 대선 토론
 링크 : "민생을 풀지 못한 책임은 통감하오나 민생을 만들어낸 바는 모든 책임을 지기 어렵다." _ 노무현
 링크 : 메커니즘 경제학 이론으로 본 '노무현 대통령의 딜레마' _ 아고라

더불어 사소한 것에 자꾸 신경을 쓰며 감정의 노예가 되어 스스로의 존재를 소외시키는 나를 보게 된다. '소유'라는 개념이 다양한 방식으로 적용가능한 것에 대해서도 계속 주지하고 있다. 앎이 나를 바꾸는 와중이다.

'Game Ruler'가 설정해 놓은 범위 안에서만 놀아날 확률이 높은 것이 사람이라고 말하는 개념이 참 많다. 지난 대선은 '경제'라는 화두가 설정되어 있었고 대중의 기본 믿음에 거스르는 주장을 한 정동영은 프레임 밖에 있었다. 'BBK사건'으로 프레임 자체를 전환해 보려는 시도는 좋았으나(?) 해당 GameRule의 설정은 누구에게 어떻게 어디에서 만들어졌건 확고했다. 더불어 지나서 프레임이 걷히고 나니 그 안에서 '민생파탄'과 '경제의 죽음'을 똑같이 따라 외치던 '군중'들은 다시금 '노무현의 죽음'이라는 사건을 맞이하여 '그게 아니었구나' 등의 반응을 보인다. 프레임이 보인 것이다. 혹은 '지금은 보이지 않는' 다른 프레임이 펼쳐진 것이다.
'프레임'이나 '헤게모니'따위로 굳이 치장한 단어를 말하는 이유는 그것이 '자발적' 세뇌 혹은 복종을 나타내며 그것을 파악하기가 매우 쉽지 않다는 특징을 말하기 위해서다. 민주주의 사회의 'Ruler'는 당연히 시민이지만 그는 단지 理想(이상)이며 즉 '이루어지지 않은' '유토피아'로서의 발전 방향일 뿐 아직 성취된 상태는 아니다. 여전히 지금의 역사는 '기득권'과 비기득권 사이의 수탈 싸움이며 지금 그 수단은 합리성과 논리가 아닌 '감정조정'과 Image다.
더불어 '던져진' 프레임은 대중의 감성과 인간 사회 특유의 '쏠림효과'로 인해 피할 수 없는 '화두'가 되기 때문에 그에서 회피한다는 것은 어렵다. 대부분의 시간과 공간에는 말할 수 있고 그것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정치적 스펙트럼'이 제한되어 있다. 이를테면 '교육의 상품성'에 대한 논의라든지 '주주 자본주의에 대한 의문'따위는 사회에서 진지하게 받아들여 논의되지 않는다. '비현실성'이라는 프레임아래 당연하게 생각하고 의문을 품지 않는다든지 '감정적 반감'을 가지고 대안찾기나 논의자체를 거부하려는 태도는 스펙트럼이 가진 특징이다. 그에 갖혀 대부분의 사회현상은 생산적이고 획기적 혹은 창의적인 논의가 불가능하고 극단적 의견은 아주 배제되며 그저 현상에 대한 '감성적 접근'만이 허용되고 있다.
사실상 그런 군중의 대응은 기득권 층에서는 예상된 것이고 바라는 바다. '이명박 탄핵 결의안 서명'과 같은 시민 대응은 차라리 기득권 층이 바라는 바일테다. 소위 3S정책이나 포커스를 딴 곳으로 돌리려는 정부(?) 시도따위가 흔하게 거론될 수가 있는데 문제는 그렇게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눈에 이미 보이는 문제는 문제가 아니다.
대중의 정치성향이 감정적, 비합리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일단면은 굳이 주저리 주저리 씨부릴 필요도 없다. 이명박 대통령의 당선 사실만 봐도 바로 수긍할 수 있다. 따라서 비합리적이고 감정적인 대응을 해가는 것이 비기득권층의 정치 전략이 되야할 것이다. 이는 시민의 수준 문제가 아니라 인간 본성 및 심리학의 주제로 넘어가기 때문에 거스르기가 쉽지 않다. 고독감의 해소와 연대를 통한 강인함 따위를 느끼고 싶어하는 인본성은 어울리기 좋아하는 사람들이나 가까운 Club 혹은 Party 아니면 MT 등 여럿이 어울리며 즐기는 곳에 가면 충분히 느낄 수가 있다. 고등학교 수학여행을 가면 몇 백명이 단체로 동일한 감정과 동일한 행동을 보이는 것을 보고 두려움을 느끼고 거부감을 느끼는 이들을 '아주 간혹만' 만날 수가 있다. 우리는 동일하게 무한도전에 열광하고 '아리랑'의 감정을 공유한다. 파시즘은 우리에게 아주 가까이 있는 개념이다.
지금의 기준에서 룰을 바꾸는 시민전략이 세워지고 장기적으로는 감성보단 합리적 접근을 바탕한 사회적 참여가 이루어져야할 것이다. '자유 민주주의'라는 단어에 거부감을 보이지 않는 이는 교육이 기득권층의 이득을 교묘하게 대변하며 알기 힘들도록 한다는 말에 코웃음칠 자격이 없다. 교육은 교활하게 만들어진 정치 시스템에 다름 아니다. 눈에 보이는 대안, 수용가능하지만 꺼려하는 것처럼 제스쳐를 취하는 기만을 의식해야 한다. 스펙트럼의 한참 바깥에 있는 '위험한 생각'만이 우리 모두가 당면한 현실의 문제를 타파할 수 있는 창조적 대안이 될 수가 있다. 우리는 자유롭지 않다. 우리는 노예다. 그리고 이런 말에 거부반응을 보이는 것이 기득권층이 바라는 바다. 왜 작금의 생활을 '과거'와 견주어야 하는가? 도대체 진보의 의미가 어디에 있는 것인가? 그런 거창한 단어들을 차치하고 서라도 당연한 민주주의적 권리를 획득하려는 노력이 부재한 것은 역시 '살기 좋아서'인 것일까? 대중은 죽을 것 같지 않은 상황이라면 거의 행동하지 않는다는 말 어쩌면 진짜인 것 같다. 행동비용이 많이 드는 일은 정말 못살겠다 싶을 정도가 아니면 하지 않는다. 거창한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자유가 먼저인가 민주가 먼저인가? 왜 '자유 사회주의'나 '민주 공화주의'따위의 단어는 없는 것인가? 아니 왜 흔히 쓰이지 않고 굳이 찾아가야만 하는 단어인가? 단어와 간결한 image야 말로 정치의 핵심이지만 전략이 부재한 것인가? 누가 '아나키즘'이라는 말에 거부감을 갖도록 설정해 놓았는가? 우리 생각과 감정은 왜 이렇게 형성 되었는가? 사람들이 욕해야할 것이 정부인가? 삼성 재판이 묻히고 이명밖의 똘짓에 6월 10일을 앞두고 시국선언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사회적 FOCUS인가 고민하는 것은 역시 나의 똘끼에 불과한가? 우리가 욕해야 하는 것이 정부인가? 우리가 해야할 것이 욕하는 것인가? 별 것 아닌 생각이 길어졌다. 주저리 주저리 블라 블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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